2026년 사무엘서1강 (오후찬양예배)
제목 : 고난, 틀림없이 무슨 뜻이 있습니다
본문 : 사무엘상 1장 1~11
결단 찬양 : 주만 바라볼찌라
구한말 우리나라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 박사는 그의 저서 “대한 제국 멸망사”에서 한국인의 종교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한국인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 때는 영혼 숭배자 즉 미신적이 된다. 따라서 어느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면, 그가 고난을 당할 때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보면 된다” 참으로 탁월한 분석이라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삶의 규범은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명상과 사색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적 사상입니다. 그러나 무슨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뜻하지 않은 고난을 당할 때에는 한국 사람은 이상하리만큼 너나 할 것 없이 샤머니즘적 신앙인이 됩니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이란... 샤먼에 해당하는 무당, 점술가, 예언자를 찾아서 자신의 고난을 해결하려는 원시적 종교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성도들이 뜻하지 않는 사고나 고난을 당했을 때, 그런 상황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을 봅니다. 오래전에 한국 단군교 교주를 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김혜경 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용한 역술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그녀의 고객들 중 상당수가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사고가 터지거나 역경이 닥치면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돈 내고 점쟁이에게 와서 묻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샤머니즘 신앙에 물든 변형된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름하여 기복 신앙이라고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점보고 사주에 매이고 팔자타령하고 이사 날짜나 혼인 날짜 잡을 때 손없는 날(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귀신이 없는 길한 날)을 잡으려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그리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모르게 우리 조상들로부터 문화속에 내려와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배여 버린 감염된 미신적 신앙으로 고난을 이해하는 그런 견해가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적 고난관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고난은 어디서 올까요? 고난은 왜 있는 걸까요? 고난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인류의 첫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남으로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난이란 결국 하나님과 분리되어 인간의 한계성 속에 갇혀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입니다.
방금도 설명했지만 고난은 조상에게 제사를 잘못 드렸기 때문에... 혹은 이사 날짜를 잘못 잡아서... 혹은 집터가 좋지 않아서... 조상의 묘지를 잘못 잡아서... 혹은 내가 태어난 연도와 날짜와 때가 좋지 않아서 발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내가 만물 안에 있는 정령들에게 잘못해서... 마을의 당산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에 당산나무 속에 있는 정령이 노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고난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사람이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단순히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발생한 악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인과응보적인 차원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그 자체가 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도 숨어 있기 때문에 고난 그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고난관입니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예수님께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이 슬픈 상황인 고난을 죄의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맹인으로 태어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소경이라는 고난이 왔다는 것입니다. 맹인 된 그 사람에게는 적어도 맹인이라는 고난 자체가 죄의 결과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죄의 결과물로만 해석하려는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고난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첫째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혹은 사회적인 구조적인 악의 결과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를 들어서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났다든지, 지진이나 화산 폭발로 인해서, 혹은 전쟁으로 인해서 우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은 나의 죄와 상관없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애매한 고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애매한 고난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실 산 소망을 붙잡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에게는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받았기에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입니다.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찬송가 438장을 부릅시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두 번째로, 부끄러운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고난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을 일삼다 그 악행의 대가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아무 긍정적인 의미도 없으며 부끄럽게 생각하고 오직 회개함으로써 그 고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 번째로, 의로운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받거나 주와 복음 때문에 까닭 없이 미움을 받아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정당한 고난으로써 하나님의 칭찬과 미래의 영광이 보장되어있는 의미 있는 고난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이런 의로운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절)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한나의 고난이 바로 세 번째 고난입니다. 의로운 고난입니다. 그러면 한나의 고난은 어디서 왔습니까? 다 같이 5~6절 말씀을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한나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발생한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신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 임신하지 못하는 불임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반면에 많은 자녀를 거느리는 것을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의 결과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녀를 낳지 못한 한나를 향해 소곤거리면서 말했습니다. “한나 저 여자는 뭔 죄가 많아서 아기도 갖지 못할까”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한나의 고난은 사람들이 모르는 큰 죄를 저질러서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린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크나큰 뜻을 가지고 선한 목적하에서 한나의 태의 문을 닫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고통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는 것으로 봅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고난에 대해서 잘못 대처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의 남편 엘가나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아내가 아기를 오랫동안 갖지 못하자 둘째 아내인 브닌나를 얻음으로써 고난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고난을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물론 명분은 좋습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엘가나는 레위인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라는 신분을 가진 성직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성경이 금하는 일부다처제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영적으로 비둔하면 세상에서 허용하는 죄의 문화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경의 말씀이 가치관이 되어야 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가 뭐라고 하든지 우리 시대의 풍속과 유행이 어떻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각의 절대기준이 되고 가치관이 되고 세계관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엘가나의 인간적인 타협이 한나의 고난을 가중시켰습니다. 둘째 아내인 브닌나가 자녀를 낳지 못한 첫 번째 아내 한나를 조롱하고 멸시하면서 심히 격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엘가나의 가정의 행복은 풍비박산이 나고 바람 잘 날이 없는 격랑에 빠져들었습니다. 고난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면 그 고난은 가중되고 해결할 수 없는 더 큰 고통의 바다로 진입해 들어갑니다. 이런 고난의 태풍을 잠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10~11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 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가 자신의 고난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나는 고난 앞에서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이 남자가 왜 둘째 아내를 얻었는가? 왜 기다려 주지 않는가? 내 남편이란 사람이 입만 사랑한다고 하고 행동은 둘째 아내를 얻어버린 이중인격자가 아닌가? 믿을 수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남편과 툭하면 부부 싸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남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고난의 상처를 더욱더 아프게 한 남편의 이중적인 행동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한나는 브닌나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결혼 서열로 하면 한나가 안방 마님이요 브닌나는 첩입니다. 한나를 형님 형님 하면서 깍듯이 존칭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브닌나는 되먹지 못했습니다. 한나의 약점을 가지고 인정사정없이 공격했습니다. 아기를 낳아야 안방마님이지? 가문의 대를 잇는 아기도 못 낳은 주제에... 하면서 한나의 아픈 부분을예리하게 공격했습니다. 얼마나 브닌나의 독설과 조롱이 마음을 아프게 했던지 한나의 눈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고통이 너무 크면 음식 맛이 사라집니다. 밥을 먹지 못합니다. 한나가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브닌나와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무자한 이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은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원 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의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 한나는 고난의 환경을 수용했습니다.
힘겹고 무거운 고난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환경을 벗어나려는 그 어떤 극단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브닌나의 행동을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고난의 환경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자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위대한 점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사건 중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지 않는 사건은 없습니다. 고난도 하나님의 통제 속에 있고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 우리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고난 때문에 우리가 죽지 않을 것을 압니다. 분명합니다. 고난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의 환경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벗어나려 하지 마십시오. 고난이 힘들다고 고난의 옷을 벗어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비켜 가려고 하나님을 조정하려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뜻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고난을 가중시키는 사람들에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맙시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대답하시고 고난의 신비한 비밀을 벗겨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한나는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한나를 서원 기도의 자리로 나가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만약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 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자식을 주지 않으시고 고통스럽게 하셨는데... 그 자녀를 주신다면 이 아이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예! 주님 알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자녀라면 그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 자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면서 하나님께 서원 기도한 것입니다. 한나는 기도 중에 자녀를 주실 하나님을 확신했고 그 자녀가 특별한 아이가 될 것임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한나의 서원 기도를 받으시고 사무엘을 낳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1000년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천년의 분기점을 만드는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요 최초의 선지자로서 삼중직을 행한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예수님의 삼중직을 유일하게 행했던 인물입니다. 이런 위대한 인물 사무엘이 한나의 서원 기도 속에 잉태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위대한 새 일을 행하십니다. 고난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비는 고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협력하여 선을 만들어 가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세상적으로 형통할 때 놀라워하지 않습니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예수님 믿지 않고도 번성하고 세상적 성공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지 않고도 수능 1등하고 서울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놀라워하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소망과 성숙함을 드러내는 경우를 볼 때입니다. 기독교인은 현세적으로 형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난은 기독교의 수치가 아니라 신비이며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한나는 기도로 고난의 신비를 벗겨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3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고난의 때에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우리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고난의 때에 한나처럼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도 한나처럼 승리의 찬양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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