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누가복음59강(제목 : 왜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까?)
2025-11-26 18:15:17
김성철
조회수   19

누가복음59

제목 : 왜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까?

본문 : 누가복음 18:15~17

 

누가복음에는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이 내용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해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 기사내용이 있기 바로 앞 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의를 자랑하고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주님만 의지하는 세리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 본문과 연결 선상에 있으면서 세리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여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실 성경은 때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3:11절에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어린아이의 부정적인 면을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인격적으로 미숙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짧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고집을 부리고, 드러눕고, 악을 쓰면서 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본문 말씀은 어린아이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나오게 되는 배경은 이렇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부모들이 예수님께서 안수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큰 위인이나 훌륭한 랍비에게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기도를 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풍습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기도 받게 하고자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부모님들을 꾸짖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왜 귀찮게 하느냐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진지하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전하시고 계시는데 말귀도 못알아 듣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방해가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도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의 풍조는 어린이와 여자를 불완전한 존재로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수를 셀 때에도 여자와 어린아이는 빼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어찌하든지 축복기도 받고자 하는 그 부모님들의 믿음이 너무나 귀하고 귀하게 보입니다. 이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이가 예수님으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했습니다. 부모는 어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복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디로 데려갑니까? 한국 속담에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최고의 교육환경에서 말은 최적의 환경에서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좋은 교육환경이 갖추어진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성어도 동일합니다. 맹자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습니다. 맹자는 어려서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없던 맹자는 묘지 근처에서 장례하는 것을 따라 곡하는 등 장례지내는 놀이를 하면 놀았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시장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도 교육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판단하고 학교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글 읽는 흉내를 내고 시를 낭송했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이야 말로 자식 교육에 적합하다 여겨 그곳에 머물며 살면서 맹자를 위대한 학자로 키웠습니다.

 

요즘 많은 부모들이 어린 아이를 좋은 학군으로 데리고 갑니다. 좋은 교육시절이 있는 곳에 틀림없는 성공의 기회가 있습니다. 좋은 학군에 있을 때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데 취업할 수 있고 세계적인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은 지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어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것을 요즘으로 해석하면 교회에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게 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몸에 배이게 하고 찬양을 가슴에 새겨넣고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그리고 여러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을 아이들의 심령에 새겨놓는 신앙교육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특별히 어린아이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말씀을 통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이것은 그들의 인생의 최고의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아야 그 후에 땅의 기름진 복도 함께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우리 자녀들이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살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부모님들처럼 자녀들을 예수님으로부터 축복받게 하려는 이런 열정을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부모님들이 배워야 합니다. 세상 교육으로부터 받은 축복보다 신앙교육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모님의 귀한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그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1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를 꾸짖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편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점에서 어린 아이같은 자의 것일까요? 어린 아이들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로 어린아이들의 절대적 의존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는 헬라어 브레페로서 엄마 품에서 젖을 먹고 자라는 갓난아이를 말합니다. 젖먹이 유아는 산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이 어린아이는 아무 힘도 없으며 그의 생명은 전적으로 산모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갓난아이들은 부모님의 가슴에 등에 업혀서 어떤 아이는 부모님의 손에 붙잡혀 아장아장 걸어서 예수님께 온 아이들입니다. 부모가 못 오면 아이도 못 옵니다. 부모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 이것이 갓난아이의 의존성입니다. 마치 이 사건 앞에 기록된 세리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체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런 의존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저는 갈 데가 없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하나님은 이런 의존성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의롭다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의 철저한 의존성이 너희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어린아이들이 자기 부모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것처럼 너희가 그렇게 하나님께 의지하느냐? 이 자세가 너희에게 있느냐?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동물 중에서 사람만 태어나면 오랫동안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어렸을 때 송아지가 태어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송아지가 태어난 후 어미 소가 축축한 송아지의 온몸을 핥아주자 잠시 후에 비틀비틀 하면서 일어나더니 곧바로 네 발로 그냥 일어서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후 1년이 되도록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우리 손주는 2살이 되었어도 지금도 혼자 걷지 않고 나만 보면 안아줘 안아줘 합니다. 인간은 포유류 과 중에서 유일하게 가장 오랫동안 부모를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존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을 가진 자들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잠언 31편까지 주구장창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지리라”(16: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그 분 만을 나의 힘으로 삼고 나의 보호자로 삼고 나의 피난처로 삼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할 때부터... 우리의 영혼을 만들 때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죽음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점점 어린아이처럼 더욱더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의 타락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 점점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내가 알아서 할께요 하면서 자신의 주권성을 내세우는 자율성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신앙이 성장할수록 어린아이처럼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하는 믿음을 드리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어린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절대적 신뢰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를 신뢰합니다. 우리 손주를 보면 엄마가 아무리 혼을 내도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엄마에게 안깁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부모님이 옆에 있으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 신뢰하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겠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신뢰하면서 모든 환경에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개 취급하며 자녀들이 먹어야 할 빵을 취하여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에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개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절대 신뢰하면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떨어진 부스러기는 주워먹습니다 하면서 부스러기 축복이라도 주십시오 하고 겸손히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수로니게 여인의 믿음을 축복하사 딸을 치료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그곳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나를 지켜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시는 그 주님이 나와 동행하고 있다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한신뢰가 있는 성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의 단순성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한게 특징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이런 단순함, 순수함을 가져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들입니다. 이들은 이중적입니다. 단순성과 이중성은 양극단에 있습니다. 단순함은 앞뒤가 같고 겉과 속이 같습니다. 뭘 자꾸 꾸미지 않습니다. 반대로 겉을 자꾸 꾸미는 것을 외식이라 합니다. 더 선한 것처럼 더 착한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단순한 것과 반대되는 이런 이중성, 외식과 위선의 특징은 계산성과 복잡성을 가집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면 참 단순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일 될지라하고서 너는 너의 본토 친적 아비집을 떠나라 하면 단순하게 그 말씀을 의지하여 떠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때로 자녀 한 명 안 주는 하나님의 때문에 의심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을 것이다하면 바로 아멘! 합니다. 때로 불신으로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다가도 또 찾아와서 회개하라고 하시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면 곧바로 순종하여 할례를 행합니다. 또한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받치라 하면 그 다음 날 일어나 모리아산으로 가서 진짜 번제로 드립니다. 이렇게 말씀만 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의롭게 여겼습니다.

다윗도 그렇습니다. 다윗은 신앙이 성장할수록 어린아이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고 압살롬의 반역에 쫒겨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대적이 앞에 있어도 그의 잔이 넘쳤습니다. 그는 이해 할 수 없는 고난 속에 있었지만 늘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행복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목동에서 왕이 된 후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어린아이였습니다. 법궤가 다윗 성에 들어 올 때 얼마나 기뻤던지 어린아이처럼 속살이 보이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목동에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왕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로 살았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살았기에 점점 더 많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생 노년에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29:10~13) 다윗은 그의 전 인생 동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분이 그어준 말씀의 선을 단순히 지키면서 오직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어준 말씀의 선을 지킬 때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은혜와 큰 복을 누렸는지 이렇게 아름다운 감사기도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결론입니다. 17절을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을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이 성장할수록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더욱더 하나님 한 분만을 의존해야 합니다. 더욱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 앞에서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붙잡고 틀림없이 무슨 뜻이 있겠지요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 할 때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승리의 신앙생활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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