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44강
제목 :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본문 : 누가복음 13:31~35
우리는 지금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새벽에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공격함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면전 양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도 4년째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은 대만을 편입시키고자 모든 전쟁계획을 세워두고 시기를 재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환경문제, 자원고갈, 전염병, 식량난, 전쟁과 기근, 자연재해 등으로 인류는 급속히 종말의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역사관은 다양합니다. 인류의 첫 번째 역사관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순환론적 역사관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처럼 역사는 계속해서 순환적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고대 중국, 인도 등 동양의 많은 나라도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졌습니다. 이 역사관의 한계는 무한반복입니다. 역사의 목적과 방향이 없습니다. 그 후 과학의 발전으로 진보주의 역사관이 나타났습니다. 역사는 성장하고 성숙하고 완전한 낙원을 향해 발전해 간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진보 의학의 진보로 인한 영원히 살 수 있는 인간의 생명과 지속적인 도덕 윤리의 성장 등 온갖 좋은 미래를 꿈꾸는 낭만적이고 희망주의 역사관입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과학의 진보는 원자탄 수소폭탄의 발명으로 인류멸망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도덕 윤리의 진보가 아니라 갈수록 도덕 윤리의 타락 현상입니다. 죄가 더하고 윤리의 붕괴는 가정 붕괴로 연결되고 심지어 AI시대와 챗Gpt의 발전 등은 인간의 존재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위험한 과학발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마르크스 역사관입니다. 흔히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유물사관이라고도 합니다. 역사는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파악하는 역사관입니다. 역사의 발전은 가진 자들과 빈곤한 자들의 계급투쟁의 역사로 파악했습니다. 결국 가난한 프롤레타리아가 부자인 부르조아를 몰락시키고 계급 없는 사회 공산주의 도래가 필연적으로 도래하며 임금, 화폐, 국가가 없는 사회를 목표로 전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그리고 북한 사회의 비참함은 공산주의 역사관은 실패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중국식 공산주의 또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역사관을 붙잡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역사관은 역사의 주체가 인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역사관은 인간이 역사의 주체이지만 그 역사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구속사를 완성해 간다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에서 목적이 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우연히 발생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역사관은 종말론적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종말 이후에 새 하늘 새 땅이 시작되는 진정 의미의 진보주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창조 – 타락 - 구속 – 새 창조의 구속사 완성을 향한 직선적 역사관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목적론적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역사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역사 속에 오신 사건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초림 사건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30년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고 그 나라가 세워지게 하는 복음을 완성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흔히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시간을 복음 전파의 기간으로 보며 동시에 종말의 때로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이고 인류의 종말이며 동시에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는 시기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독교 역사관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희망의 역사관입니다.
누가복음 후반부에서부터 예수님은 계속해서 종말의 때를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사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한마디 한마디 말씀은 결연합니다. 누가복음 9:52절에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11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향하여 “화있을 진저 바리새인이여...화있을진저 율법교사여...” 그들의 위선적 신앙을 무섭게 책망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몸만 죽이는 세상의 권세자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를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죽음 이후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신앙생활하라고 합니다.
12장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으니 깨어서 늘 준비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2:56절에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말씀하시고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빌라도가 죽인 갈릴리 사람처럼,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명의 사람처럼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더불어서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는 찍어 밖에 내던져 버릴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더불어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회개의 열매, 믿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앞 주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7:13,1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크고 넓고 화려한 문이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그 길 끝은 멸망입니다.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반면에 구원의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습니다.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고생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넓은 문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담대하게 회개와 겸손과 순종과 헌신을 의미하는 좁은 문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고는 예수님께서 친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는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31절 말씀입니다.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는 정보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위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위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더 이상 복음사역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 기간 내내 종교지도자들에게 많은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받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헤롯왕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핍박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더구나 헤롯이 누굽니까? 그는 그동안에도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말을 들으면 겁이 나서 위축되어 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32,33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헤롯이 아무리 위협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겠다고 하십니다. 그동안 감당해 오신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하시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래는 갈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래는 살아 있는 동안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변함없이 사명을 감당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제 삼일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는 아무리 헤롯이라도 예루살렘 밖에서 예수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불의의 사고로도 죽지 않습니다. 질병에 걸려도 죽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제 삼일에 부활하심으로 복음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다른데서 죽을 수 없습니다. 사명자는 사명을 마치기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요셉이 17세 때 꿈을 꾸었습니다. 두 번이나 유사한 반복적인 꿈이었습니다. 한 번은 요셉의 곡식단은 일어서고 형님들의 곡식단은 요셉의 곡식단을 둘러서서 절을 했습니다. 또한 한 번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꿈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해서 가나안 땅에 있는 12지파를 애굽의 고센지역으로 이주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담긴 꿈이었습니다. 형님들은 이 꿈이 요셉을 왕이 되게 하는 꿈처럼 여겨 시기심이 생겨 요셉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을 형님들의 시기심이 찢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은 20에 팔려 애굽의 노예가 되고 심지어 보디발 여사의 미움을 받아 강간범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룸으로 요셉의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훗날 요셉은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판 형님들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하자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19~20) 너무나 귀한 고백입니다. 사명을 이루기까지 요셉은 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고 뱀에 물리고 광풍을 만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헤롯에 의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그의 쇠사슬을 벗겨지게 하시고 그를 세 개의 문을 통과하여 살리시고 그를 통하여 초대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사명을 완수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명을 완수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 유명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사실 베드로는 로마의 황제의 핍박을 벗어나고자 로마를 떠나는 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 앞에 나타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에 들어간다”라고 대답하자 베드로가 눈이 뜨이고 주님의 하신 말씀의 의도를 알고 로마로 들어가서 고통과 환난 당한 양 떼들을 돌보다가 결국 거꾸려 십자가에 메달려 순교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마칠 때에는 순교자의 면류관을 쓰게 하셨습니다.
살아야 할 때가 있고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명을 마치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완수한 후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그 때는 기쁨으로 사명을 완수하는 죽음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죽음은 사명을 완성하는 마침표입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횡단을 하는 여행 중 사자에 물려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치명상을 입어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리빙스턴이 영원히 회자 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죽지 않는다” 그 확신대로 그는 죽지 않고 살았으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마칠 때까지 정글 속 탐험을 계속하면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열심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질병도, 불의의 사고도 우리를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과 내일과 모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 삼일에는 완전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삼 일은 죽는 날입니다. 그러나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명이 완전하여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자는 죽음으로서 완전해진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전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오래전에 부산수영로 교회를 개척하셨던 정필도 목사님의 마지막 임종의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은 마지막 임종 때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성도들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교회를 의탁하고, 축복하면서 마지막 임종을 하셨는데 정말 그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 보이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나도 마지막 임종의 때에 저런 모습으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명의 길을 가면서 하신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합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오늘과 내일과 모래에 가야 할 길은 죄와 사망 권세에 신음하는 영혼들을 말씀과 이적으로 도우며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은 감당하겠다는 결연한 고백입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좁은 길을 가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의 서시가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마 신실한 기독교 청년이었던 윤동주의 이 서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영감을 얻어서 쓰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원했습니다. 특별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인생들을 사랑하면서 살겠다고 인간애를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의 삶을 오늘과 내일과 모래에 내가 살아있는 동안 성실히 수행할 것을 결단 합니다. 윤동주 시인 자신도 예수님처럼 죽음을 각오하면서라도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진리를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명의 길을 각오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사도행전20: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이나 윤동주 시인이나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고자 하는 분명한 철학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어떤 죽을 수 있는 상황이나 환경이나 핍박이나 환난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관은 종말론적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입니다. 이 뜻을 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사명의 완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완전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예수님처럼 주와 복음을 위한 사명자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의 새 몸을 입고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다 죽어야 할까요? 우리는 살았을 때에는 열심히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죽음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을 마치고 죽는 그 순간에 가장 위대한 사명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육체에서 자유를 얻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생 복락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사명의 클라이막스요 완성의 순간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복음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여 살아있는 동안은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하다 때가 되면 멋진 죽음을 맞이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승리를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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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누가복음37강(제목:염려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아세요) | 김성철 | 2025-03-23 | 86 | |
50 | 누가복음36강(제목: 영혼이 돌아갈 곳 준비되셨나요?) | 김성철 | 2025-03-16 | 123 | |
49 | 하가다시리즈 5강 (제목: 경건이 습관이 되신 예수님) | 김성철 | 2025-03-09 | 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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